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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지순례] 김제 금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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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DATE : 202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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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부를 목사로 섬긴, 부자와 머슴의 우정이 마들어낸 아름다운 교회"

 

김제 금산교회는 전북 김제 모악산 기슭에서 1908년 4월에 데이트(Lews Boyd Tate) 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1904년 말, 미국의 젊은 선교사 테이트(최의덕)는 전주에 선교기지를 두고 정읍 땅을 가려고 모악산 자락을 넘어서 금산리를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말을 타고 가는 선교여행이라 말이 쉬어가는 마방에서 마방 주인이기도 한 조덕삼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그의 사랑채에서부터 시작된 교회가 금산교회의 시초입니다. 

​현재 김제 금산교회는 전라북도에서 기독교 문화재로는 처음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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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ㄱ"자형 한옥교회

 

 

김제 금산교회는 익산 두동교회와 더불어서 “ㄱ” 모형으로 지어진 교회입니다.

보통 교회는 일직선으로 되어있지만, 전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ㄱ”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왜 이렇게 지었을까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ㄱ” 구조를 가지게 된 이유는 그 당시에 남녀를 구별하던 유교적 관습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남녀가 합쳐서 예배를 보지 못하게, 한쪽 날개는 남자 공간, 한쪽 날개는 여자 공간으로 나누어서 서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조선 시대에서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습니다. 유교적 이념이 강했던 조선은 조상님에 대한 제사를 매우 중시했고,

신분제를 통해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입장은 조선의 이념과 달랐습니다. 조상님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사랑받아야 할 존재로 여기면서 당시 평민, 노비, 여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으로서는 기독교가 국가 운영 시스템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선의 유교 문화를 수용하면서 교회의 본성을 유지한 건물이 바로 김제 금산교회입니다.

서로 다른 문화를 인정한 포용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교회가 지어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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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산교회에서 보존되어있는 ㄱ예배당의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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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금산교회는 포용적인 배치와 더불어 아름다운 이야기까지 전해져 내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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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덕삼 장로                    ▲ 이자익 목사

 

금산교회를 말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조덕삼장로와 마부로 일하던 이자익 목사입니다.

이자익은 경상남도 출신의 가난한 장수 이씨 집안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세살 때 아버님을 잃고

여섯살 때 어머님마저 여의고 친척집에 들어가 살았는데

매일 일만하시켜 12살에 집을 나와 전라도 곡창지대로 가면 밥은 먹고 살것이라는 애기를 듣고 배를타고 하동을 거쳐 순천으로 해서

금산까지 와서 조덕삼과의 특별한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조덕삼의 아들 조영호가 천자문과 한글을 배울 때

이자익도 어깨너머로 혹은 창 밖에서 보고 들으며 글을 터득할 만큼 아주 총명하고 성실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자익은 조덕삼과 함께 테이트가 전하는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면서 이자익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이자익은 주인 조덕삼, 그리고 박화서와 함께 1905년 10월 11일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1908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 나자 지금의 “ㄱ”자 모양의 금산교회를 만들게 되고,

1909년교회가 성장해서 교인이 50명쯤 되었을 때 장로를 피택하게 되었는데,

교인들이 모여 투표한 결과 놀랍게도 지방의 유지이며 김제 부자이고 금산교회 재정을 모두 감당하고 있던 주인 조덕삼은 떨어지고,

그의 마부(머슴) 아홉살 아래인 이자익이 최고득표를 얻어 초대 장로로 피택되었습니다.

이때 교회는 술렁거리며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덕삼은 교회의 결정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교인들에게

 "나는 이자익 장로님을 잘 받들어 교회를 더욱 잘 섬기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자 온 교회가 대 환영을 하면서 조덕삼에게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는 주인과 마부(머슴)의 관계로, 교회에서는 평신도와 장로로 두 사람 모두 성실히 자기 본분을 감당해냈습니다.

 

후에 조덕삼도 금산교회에서 장로가 되었고, 이자익을 평양장로신학교에 보내어 공부를 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자익이 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된 후에는 다시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1915년  머슴 이자익은 담임목사로 주인 조덕삼은 장로로 교회를 훌륭하게 섬기는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자익은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목회하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역사에 재임한 총회장도 없는데 총회장을 3번씩이나 역임하는 등

장로교회사의 입지전적의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는데 이를 섬겼던 사람은 바로 조덕삼 장로입니다.

그는 머슴을 장로로 섬기고 자기의 재산을 들여서 공부를 데 그를 키워낸 인물이 바로 신앙을 바탕으로

자기머슴을 받들며 교회를 지키는 등 역사에 길이 남을 김제의 훌륭한 인물이였습니다.

 

 

 

 

이렇게 김제 금산교회는 한국 교회의 역사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이야기로 더욱 감동을 주는 교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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