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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지순례] 문준경전도사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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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DATE : 2021.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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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선교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스토리

 

한국의 수많은 순교자 가운데 여성순교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 이유는 순교자가 집중적으로 나온 일제시대나 6.25사변 당시는 여성이 사역자로 활동하는 경우가 극히 적었으며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적이라
여성활동 영역이 매우 제한되고 또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성결교단의 문준경(1891~1950) 전도사의 경우는 여성 사역자로서 성결교를 대표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녀의 헌신적인 사역과 활동이 순교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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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준경 전도사는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의 작은 섬에서 출생한 문준경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지런해 주위의 칭찬과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고 싶어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08년 17세의 나이에 신랑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중매결혼을 해야 했다.그러나 서로 마음이 합하지 않은 결혼은 두사람 모두에게 고통이었다.
외지를 도는 남편은 아내를 돌보지 않은 채 목포에 소실을 두고 자녀까지 낳아 살고 있었고 문준경은 이 때부터 자신은 ‘남편있는 생과부’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지내야 했다.그러나 며느리로서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데는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시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국문을 깨우치고 한문을 공부하는데 할애했다.
자신을 극진히 아껴주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도 큰 시숙과 생활하게 돼 갈 곳이 없어진
그녀는 목포로 건너와 단칸방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았다.

 

이런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한줄기 놀라운 빛으로 다가왔다.
예수를 믿으면 삶의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간 교회가 유명한 성결교부흥사인 이성봉(李聖鳳)목사(당시 전도사)가
초가집 한간을 얻어 막 개척을 시작한 북교동성결교회였다.
이성봉목사의 설교는 미래에 대한 희망도 낙도 없었던 그녀에게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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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전도사의 전도열정은 남달라 방학마다 고향으로 내려가 33년 진리교회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35년 증동리교회, 36년 대초리교회를 차례로 건립했다.

방축리에는 기도소를 지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오직 믿음만으로 교회를 세운 그녀에게 수많은 어려움과 고초가 쉬지않고 따랐으나 기도는 언제나 승리를 안겨 주었다.

졸업 후에도 대도시를 마다하고 증도로 돌아 온 문전도사는 나룻배를 타고 이섬 저섬 무교회지역을 돌며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녀는 주민들의 부탁으로 짐꾼노릇, 우체부노릇을 마다하지 않았고 섬주위 돌짝밭길을 얼마나 걸었는지
1년에 고무신을 아홉컬레나 바꿔신었다고 전해진다.

문전도사의 열정적인 기도는 신유의 은사까지 더해 정신병자, 중풍병자를 고쳐내 ‘섬 여의사’란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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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준경 전도사가 전도하며 매일 걸어다니던  증도 노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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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전도사가 최초로 설립한 진리교회 현재 예배당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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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초리교회 모습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성결교단이 강제 해산됨과 동시에 문전도사가 개척한 증도교회에까지 여파가 미쳤다.
그녀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며 목포경찰서로 불러내 고문을 일삼았다.
이 때마다 문전도사는 찬송가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를 부르며 에스더서 4장16절 “죽으면 죽으리라”를 수없이 되풀이 했다.
아무리 회유와 협박이 이어져도 굴욕적인 신사참배는 허락치 않았다.

그런데 해방후 공산당을 따르는 좌익들의 활동은 이 작은 섬까지 영향을 미쳤다
특히 6·25 후 지역 전체가 인민군의 손길에 넘어가자 평소 교회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이들이 문전도사와 성도들을 못살게 굴었다.
1950년 10월 4일.국군이 증동리섬까지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악의에 찬 공산당원들은 교인과 양민들을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끌어 냈다.그리고 한사람씩 단도로 내려쳐 죽이는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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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전도사에게 와서는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구만”이라며 몽둥이로 내리쳤고
그녀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말을 남기고 이어진 총탄에 의해 순교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59세였다. 사실은 옆에 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수양딸 백정희전도사에 의해 알려졌다.
문전도사의 헌신과 사역은 한톨의 밀알이 되어 30배, 60배, 1백배의 열매를 거두었다.
그녀가 흘린 피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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