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 임광호전도사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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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DATE : 2021.01.19본문
정말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에 위치한 하리교회에는 아름다운 인물과 아름다운 스토리가 있다.
"순교"라는 단어를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하리교회
들어서자마자 넓은 마당앞에는 임광호전도사님의 순교비가 우뚝 서있었다.
순교후에도 여전히 하리교회를 사랑하시고 지키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 임광호 전도사
임광호전도사님과 하리교회 Story
황해도 신천군에서 출생한 임광호 전도사는 신학을 마치고 목회를 준비하다가 신변의 위협을 느껴 단신으로 월남했다. 그 후 1948년 3월4일 전북 완주군 와리교회에 부임하여 타고난 친화력과 열정적인 목회로 3-4명이 모이던 교회를 200여 명으로 부흥시켰다. 이를 시샘한 좌익들이 임전도사의 목회를 방해하기 했고, 결국 임광호 전도사는 와리교회를 사임하게 된다. 그리고 6.25가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950년 4월16일, 집사였던 백한나, 전경순, 유정례 씨와 함께 백한나씨의 논에 천막을 치고 하리교회를 개척하고 6월 초순, 와리와 하리 중간지역에 건평 20평의 성전건축 기공식을 가졌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논밭에까지 찾아가서 성심껏 치료하는 그의 모습에 많은 주민과 청년들이 따랐으며 교회도 점차 부흥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6.25전쟁이 발발했다. 가족과 성도들은 공산당들의 핍박이 계속되자 피난을 권했으나 임 전도사는 “목자가 양떼를 버리고 어디를 가느냐!”고 하였다. 그러던 1950년 7월10일, 잠깐이면 된다는 공산당의 말에 임 전도사는 끌려갔다. 사모는 임전도사가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사모는 수소문 끝에 삼례국민학교 치안대 독방에 갇혀 있는 그를 만났다. 임 전도사는 “걱정하지 마라. 곧 나가게 될 거다.”하며 오히려 성도들의 안부를 일일이 물었다. 그러나 이것이 사모가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임 전도사는 감옥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으며, “예수만 안 믿는다고 하면 당장 살려준다.”는 협박에 오히려 “당신들도 예수 믿어야 산다.”며 자신을 고문하는 자에게까지 전도를 했다고 한다. 교회건축 중지와 신앙의 포기를 강요하는 고문은 계속되었지만, 이를 거부하던 임전도사에게 악에 받힌 공산당원들은 “이 놈은 총알도 아까우니 몽둥이와 괭이로 때려 죽여야 한다.”며 1950년 7월20일 저녁 6시경, 임 전도사를 포함한 몇 사람을 삼례읍 와리 월산리 바위 밑으로 끌고 순교 당했다. 신앙과 교회를 지키려다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임광호 전도사는 당시 결혼한 지 4개월도 안된 신혼이었다. 홀로된 사모는 혼자 3년간 교회를 지키면서 유복자였던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성남에 있는 은행동교회 임창희 목사이다. 이처럼 희생과 헌신, 그리고 거룩한 순교의 터 위에 세워진 하리교회는 “가라 아니면 보내라.”는 선교표어 아래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다. 한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사업회는 임광호 전도사의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사진영정을 한국기독교 순교자기념관에 보관하고 돌로 순교기념비를 세웠다 |